- 順光은 안전하나 밋밋하기 쉽고 逆光은 얼굴에 그늘을 만들지만 풍경·인물에 극적인 효과 부여, 斜光은
풍부한 원근감 나타내
광선 상태·각도와 습도 감안해 창조적 변화 줘야 사진 잘 나와
- 조인원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화창한 늦가을 어느 오후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었다. 태양은 나무에게 빛을 골고루 내려줬지만 정작 황금처럼 빛나는 잎들을 볼 수 있는 건 나무 그늘에서였다. 해마다 뉴스에 등장하는 설악산이나 내장산 단풍도 해를 뒤에 두고 보는 역광에서 빨간 단풍의 색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사진도 순광이 아닌 역광에서 예쁘게 찍을 때가 많다. 사진을 찍고자 하는 대상을 해가 비추는 쪽에서 보면 순광(順光), 해를 뒤에 두고 보면 역광(逆光)이라고 한다.
사실 촬영이 쉬운 빛은 순광이다. 순광은 광선이 어디든 골고루 비추기 때문에 초점이 크게 나갈 일이 없으며 빛을 더하고 빼야 하는 노출 보정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대신 광선의 풍요로움이 사물을 평범하고 밋밋하게 만든다. 순광에서 피사체는 빛을 균등하게 받지만 그런 이유로 사진에서 돋보이는 곳을 찾기 어렵다. 실패할 경우가 적어서 안전하지만 재미없는 사진이 나오기 쉬운 게 순광이다.
반면 역광에선 사진 찍히는 인물이 해를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지고 주변보다 크게 어두울 수 있다. 카메라 노출을 정확히 잰 후 빛의 양을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어야 역광 촬영에 실패하지 않는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으면 광선의 극적인 효과를 반영할 수 있다. 울긋불긋한 단풍은 햇빛이 나뭇잎을 통과하는 역광에서 더 화려한 형태와 색을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사진가들은 한여름 무성한 초록의 잎들도, 들과 산에 핀 야생화도 대부분 역광으로 촬영한다. 자연이 아닌 인물의 경우에도 역광은 자주 활용된다.
사례가 되는 부끄러운 기억이 하나 있다. 사진기자 초년 시절에 어느 호텔을 찾아가서 내한한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촬영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 디자이너는 캘빈 클라인이었다. 약속된 시간에 찾아가서 호텔 스위트룸을 두드리자 관계자들 여럿이 모여 있었다. 마침내 소개받은 그가 웃으며 인사를 했다. 백발에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차림으로 청년처럼 당당한 모습이었다. 사진 촬영에 딱 10분이 주어졌다. 급한 마음에 우선 스위트룸 창문 밖 발코니로 나가자고 제안했다. 해가 중천에 뜬 맑은 날 오후여서 광선이 골고루 그의 얼굴을 비췄다. 안전하게 몇 장을 찍자 포즈를 취하던 그가 갑자기 광선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해를 등지고 돌아서서 말했다. "이제 찍어보시죠."
역광으로 선 그는 자신이 디자인한 청바지 모델들처럼 능숙하게 포즈를 취했다. 급하게 촬영을 마치고 나오며 잠시 창피했지만 분명한 교훈 하나를 얻었다. 역광은 인물의 윤곽을 살려준다는 것을.
- /일러스트=정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