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사진이란2

hongpat 2015. 9. 20. 15:4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진

[ ]

경성 아마츄어 사진구락부(1928년)

경성 아마츄어 사진구락부(1928년)

유형 개념용어

정의

카메라를 사용해 물체의 형상을 감광막 위에 표현해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만든 영상.

내용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ϓ선, 전자선 등의 작용에 의해서 감광면() 위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물체의 반영구적인 영상을 양화() 또는 음화()의 상으로 만들어 내는 기술이다. ‘빛’과 ‘그린다’는 그리스 어의 포스(phos)와 그라포스(graphos)의 합성어로 카메라를 사용하여 사물의 빛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카메라를 사용해 사물과 실제의 현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사진은 복제와 시각적인 전달 매체를 통하여 사회의 각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점차 증대되어 가고 있다.

특히 사진 발명의 초기 시대의 복잡한 카메라 메커니즘은 간편하고 쉽게, 그리고 보다 더 빨리 사용해야 한다는 목적을 향해 발전해 왔다. 이와 함께 감광판도 흑백 전용의 시대에서 컬러 시대와 같이 공존하였다. 이러한 사진 산업의 부단한 발전은 사진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다. 그리고 독자적인 사진 표현 영역을 구축해 무한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리고 사진의 본질인 기록성과 독특한 표현 세계는 사진만의 세계에 머물지 않고 다른 표현 매체들과 상호 교류를 통하여 그 영역은 확대되어 가고 있다. 또 앞으로 확대되어 갈 것이다.

사진 개념의 발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포토그라피(Photography), 즉 사진이란 용어는 1839년 영국의 허셀(Herschel, J. W.)이 처음 사용한 이후 세계인의 공통어가 되었다. 사진 발명은 1820년대에 광학과 화학의 결합으로 완성되었으나, 여기까지 도달하는데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시일이 걸렸다. 사진의 발명과 개발은 오랜 시간과 수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실험, 땀의 결정이었다.

프랑스의 니에프스가 자연 풍경을 최초로 고정한 헬리오그라피를 완성한 것이 1826년, 탈보트가 칼로타입을 발명해, 음화(), 양화() 방식의 길을 연 것은 1840년경이었다. 사진은 그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인류 사회의 제반 구조 속에 그 영향이 미치지 않은 분야가 없게 되고 말았다.

사진은 기본적으로 상을 영원히 정착시키는, 다시 말하면 빛에 민감한 필름 위에 피사체의 순간을 포착해서 잠재적인 상으로 보존하고 복제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사진은 카메라나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영상을 필름에 투영시키고 현상 과정을 거쳐 인화지나 그 외의 방법으로 포지티브 상을 완성했을 때 그 의미가 성립된다.

사진의 발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된 것은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hi)는 카메라 옵스쿠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그의 비공개된 노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약 한 채의 주택이 있고 그 주택의 햇빛이 들지 않는 벽에 조그맣고 둥그런 바람구멍이 있으며, 그 벽 맞은 편으로 양지바른 건물 혹은 광장이나 들판이 보인다면, 햇빛에 비치는 모든 광경은 스스로의 영상을 이 구멍을 통해 들여보내 반대편 벽에 자신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그 벽이 흰색이라면 원래대로의 모습이 그곳에 비추어질 것이다. 단 거꾸로 비춰질 것이다. 만약 그 벽에 구멍이 여러 개 있다면 각각의 구멍마다 같은 결과가 생길 것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라틴어로 어두운 방, 또는 암실을 뜻하는 말이다. 어둡게 한 방의 한쪽 면에 구멍을 뚫어 이곳을 통해서 실외의 풍경이 비치도록 해, 투영된 영상을 보거나 그리는 일종의 수상기를 말한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16세기에 들어와 포르타와 바로바르에 의해 급진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포르타(Glovanni Battista della Porta)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시해, 누구나 쉽게 이것을 이용할 수 있는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연구서인 그의 『자연의 마술Magic Naturalis』(1558년)이란 책은 여러 차례 판을 거듭했다. 그리고 수개 국어로 번역되어 16세기에 출판된 일반 과학서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1568년에 『원근법의 실제 La Pratica della Perspettiva』를 저술한 다니엘로 바르바로는 카메라 옵스쿠라의 바늘구멍 대신 렌즈를 최초로 부착해 사용했다. 그리고 투사되는 빛은 구멍이 작을수록 선명한 영상을 맺는다는 것, 화상의 초점이 선명하게 맺히게 조절하는 방법, 원근감 묘사 등 새로운 기법을 창안했다.

이러한 연구 업적은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종이 위에 비친 영상을 그리고 거기에 그림자를 더하기만 하면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18세기에 와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데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전도된 영상을 바로 보여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었다. 그리고 들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도 실용화되었다.

휴대용 카메라 옵스쿠라 중에서 특기할 만한 성과는 리플렉스형의 개발이었다. 차안(John Zahn)이 고안한 리플렉스 카메라 옵스쿠라는 오늘날의 싱글렌즈 리플렉스 카메라와 같은 원리이다. 젖빛 유리로 된 초점 판에 영상이 투영되었으며, 투명한 종이를 그 위에 올려놓고 그리기만 하면 자연을 묘사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근대 화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이 장치를 크게 이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른 방법으로는 물체를 이만큼 실물 그대로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알카로티가 지적한 것처럼 카메라 옵스쿠라의 이용은 당시대의 화가들 사이에는 거의 일반화되었다.

카메라 옵스쿠라의 대중화는 투영된 화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었다. 사진의 탄생은 여기에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실 사진은 광학과 화학을 이용하는 방법에 착안했다면 훨씬 빨리 발명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 옵스쿠라의 일방적인 의존은 발명까지 이르는데 아주 오랜 시일이 걸리게 되었다.

16세기에 카메라 옵스쿠라 연구가들은 손으로 화상을 그리는데 어떤 물질의 도움으로 기계적 복제가 가능한 방법에 착안하게 되었다. 1614년 안젤로 살라(Angelo Sala)는 질산은이 햇빛을 받으면 잉크 색으로 변한다는, 감광 물질을 발견했다.

1725년 독일의 해부학 교수인 슐체(Johann Heinrich Schulze)는 질산은의 혼합물이 담겨 있는 병에 글자를 배열한 스텐실을 붙여 햇빛에 노출시킨 결과, 노출된 부분은 검게 변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그대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슐체는 검게 변화되는 것은 질산 칼륨이 아니라 용해된 은입자라는 것도 증명했다. 그리고 산화마그네슘, 타 버린 탄산 암모늄과 비슷한 물질들이 사진술적 작용을 일으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공적을 들어 독일에서는 은염류를 기본으로 하는 사진술의 발명은 슐체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영국의 토마스 웨지우드(Thomas Wedgwood)는 종이를 질산은 용액에 담갔다가 카메라 옵스쿠라에 장전해 햇빛에 노출하면 투영된 영상을 고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실험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1799년 웨지우드는 질산은에 담근 종이나 가죽을 카메라 옵스쿠라에 장전해 영상을 고정시키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영구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은 표백제를 사용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찾지 못해 성공 바로 직전에 막히고 말았다.

토마스 웨지우드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는 1934년부터 카메라 루시다를 사용해 화학 재료를 사용해 자연을 묘사하는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은염류에 담가 감광성을 지닌 종이 위에 나무 잎사귀나 새의 깃털 그리고 레이스 같은 것들을 올려놓고 광소묘 작업도 했다. 1835년에는 쥐덫이라고 별명이 붙은 조그만 카메라로 장시간의 노출로 촬영한 다음 이것을 식염수로 정착해 불변의 영상을 얻는데 성공했다.

카메라 옵스쿠라에 투영된 영상을 감광판에 포착해, 현상 과정을 통해 평면상에 가시적인 상을 최초로 완성한 사람은 프랑스의 요셉 니세포르 니에프스(Joseph Nicephore Niepce)였다. 니에프스의 발명은 유태의 비투먼(bituman, 역청)이라는 천연 아스팔트를 디펠유에 섞어 도포한 퓨터판을 카메라 옵스쿠라에 장전해 촬영한 다음 라벤더유로 씻어내면 햇빛을 받은 부분은 굳어지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씻어내려, 햇빛을 받은 부분이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니에프스는 1826년 파리의 슈발리에로부터 구입한 카메라 옵스쿠라로 살롱-쉬르-손 지방의 생 루드 바랜에 있는 그의 자택 르 그라의 2층 작업장 창문에서 8시간의 오랜 노출 끝에, “자연을 재현한 인류 최초의 성공적 역작” 관점(Points De Vue)이 탄생하게 되었다.

니에프스는 자신이 관점이라고 불렀던 그의 연구에 전념하는 한편 파리의 화가이자 디오라마 연구가이고 사진술 연구에 열심이던 다게르(Louis Jacques Mandé Dagurre)의 제안으로 공동 연구를 모색하면서 사진술의 대중화는 가까워지게 되었다. 1829년 12월 4일, 니에프스와 다게르는 사진술의 실용화를 위해 10년간의 동업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짧은 노광으로 사진을 만들 수 있는 방법과 이 결과물을 실용화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던 니에프스는 1833년 살롱-쉬르-손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다게르는 혼자서 니에프스의 선행 연구를 근간으로 은도금 동판과 요오드로 실험을 계속해, 1837년 은판 사진술을 완성하는데 성공했다. 다게르의 은판 사진, 즉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은 동판을 은도금한 후 이를 거울처럼 윤이 나게 연마하고 깨끗이 닦은 후 옥소가 담긴 상자 위에 은판 면이 접촉하도록 놓아 감광시켰다. 옥소와 은의 증기가 빛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옥화은 막을 형성시켜 감광판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 감광판을 카메라 옵스쿠라에 넣어 촬영했다.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투영된 빛의 강약에 따라 옥화은을 은으로 변화시키면서 형성된 잠상()은 가열한 수은이 들어 있는 상자 위에서 양화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진한 소금물에 담가 정착하고 물에 씻어 건조했다. 더 이상 빛에 변화되지 않는 감광판은 광택을 내기 위해 잘 닦은 후 액자에 넣어 보존했다.

다게레오타입은 프랑스 천문대장이자 하원 의원인 아라고(Franois Arago)의 주선으로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였다.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학사원에서 열린 과학 아카데미와 미술 아카데미 합동 회의석상에서 다게레오타입의 매입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다게르에 의해 발명의 세부 사항이 공개되었다. 다게르는 <다게레오타입과 디오라마 제조술에 관한 역사 및 해설>을 발행하고 그의 매형인 알퐁스 지루(Alphonse Giroux)와 함께 다레오타입 카메라와 관련 장비를 제작하는 등 상업화에 힘썼다.

다게레오타입은 선풍적인 인기 속에 세계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많은 연구들이 줄을 이었다. 영국의 탈보트는 다게레오타입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음화 상태로 감광판에 영상을 포착해 여기에서 양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나의 음화에서 수많은 양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오늘의 사진 개념은 탈보트로부터 시작되었다.

다게레오타입은 여러 가지 결점을 보완해 1840년경에는 노광 시간을 1분 이내로 단축했다. 다게레오타입은 아프리카와 중동, 유럽과 미국 등 미지의 세계를 향한 풍경 사진 촬영에 도전했다. 파리와 런던 그리고 미국의 중요 도시에서도 초상 사진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다게레오타입 스튜디오가 개설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칼로타입은 처음부터 특허권을 설정해 사용권을 제약했으며 사진 자체도 선명한 화상을 얻을 수 없어 다게레오타입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칼로타입의 사진사적 업적은 특허권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루어졌다.

칼로타입 스튜디오를 경영하는 힐(David Octavius Hill)과 아담슨(Robert Adamson)은 스코틀랜드 자유 교회 분열을 기념하는 초상화 제작의 밑그림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인물을 촬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가까운 어촌을 찾아 풍경과 어부들의 생활상도 촬영했다. 이들 사진은 정확한 직관력과 우수한 조형 감각이 거칠어 보이는 칼로타입의 특징과 어울려 대상 인물의 특징을 잘 나타냈다.

1851년 영국의 아처(Frederick Scott Archer)가 콜로디온 습판법을 발명할 때까지 심각한 경쟁 상대 없이 함께 성공을 누렸으나 콜로디온 습판법의 실용화는 사진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다게레오타입이나 칼로타입은 퇴보하고 콜로디온 습판법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카메라는 주름 상자가 부착되고 부피가 줄어지고 짧은 노광 시간 때문에 셔터가 사용되어 휴대에 편리하고 빠른 속도로 촬영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었다.

그러나 콜로디온 습판 사진의 결점은 즉석에서 유리판에 콜로디온을 도포해 질산은 용액에 담가 감광성을 지니면 카메라에 장전해 찍은 다음 곧 바로 현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조해지면 감광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야외 촬영에는 필수적으로 휴대용 암실을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럼에도 콜로디온 습판법은 2∼20초 밖에 걸리지 않은 경이적인 감광판이었을 뿐만 아니라 1장의 원판에서 여러 장의 양화를 만들 수 있었다.

사진의 대중화는 시작되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풍물의 기록 작업이 인기를 끌었으며 풍경 사진, 건축물 사진도 주목을 받았다. 이 시대의 역사적인 기록도 콜로디온 습판법으로 촬영되었다. 1855년 360여 장의 크리미아 전쟁 기록은 영국의 로저 펜톤(Roger Fenton)이 암실 마차를 전쟁터에 끌고 다니면서 콜로디온 습판으로 촬영한 것이다.

매튜 브레디(Mathew R. Brady)와 가드너(Alexander Gardner), 오설리반(Timothy H. O'Sullivan) 등은 남북 전쟁에 뛰어들어 미국 역사의 귀중한 순간을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콜로디온 습판법은 후에 발명된 리차드 매독스(Richard L. Maddox)의 건판 사진술에 의해 초상 사진의 세계를 활짝 열어 나갔다.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é Adolphe Eugéne Disdéri)는 명함판 사진(carte de visite)을 고안해 냈다. 그래서 그의 사진관은 사진을 찍으려는 고객들로 연일 줄을 설 정도로 파리가 떠들썩했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에 건너가서도 그 인기는 시들어지지 않았다.

초상 사진의 열기 속에서 초상 사진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일단의 초상 사진가들, 나다르(Nadar,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뚜르나숑)을 비롯한 일단의 파리 사진가들과 영국의 여류 사진가 줄리아 마가렛 카메론(Julia Margaret Cameron) 등이다. 나다르는 당시대의 저명한 예술인들을 단순한 배경 앞에서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게 해 대상 인물의 모습을 솔직하고 리얼하게 표현하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표출했다.

영국의 카메론 부인은 유명 인사들을 얼굴만을 클로즈업하거나, 아웃 포커스로 처리해, 피사체에 대해 내면의 어떤 것을 기록해 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고급 예술로서 통용되는 속성을 사진으로 보여 주려고 했다.

19세기 후반에 대두된 레일란더(Oscar Gustave Rejlander)와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으로 대표되는 회화의 기법을 모방한 사진, 이드웨어드 머이브리즈(Eadweard Muybridge)와 에티엔느 쥘 마레이(Etienne Jules Marey) 등의 인간과 동물의 동작을 사진으로 기록한 성과,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이 회화주의적 합성 사진에 반대해 자연을 주제로 삼을 것을 제한한 자연주의 사진, 그 외에 인상주의 사진, 회화의 테마를 모방한 사진, 다큐멘터리 사진 등이 등장해 근대 사진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1867년 영국에서 개발된 건판과 1880년대 코닥의 등장은 사진의 대중화 그리고 사진술을 가족 단위로 만들었다. 100장의 롤 필름이 장전된 휴대하기 편리한 카메라를 코닥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여 셔터만 누르면 현상과 인화를 해 주는 편리한 방법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1886년 사진의 예술적 접근에 대하여 최초로 예술로서의 사진을 제기한 것은 영국의 에머슨이었다.

그러나 사진을 독자적인 예술로서,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을 확립한 것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s)이었다. 스티글리츠는 사진 전람회나 여러 가지 사진 활동을 통해서 사진에는 개인의 예술적 감정과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클라렌스 H. 화이트(Clarence H. White), 거트루드 캐세비어 (Gertrud K○sebier), 알빈 랭던 코번(Albin Langdon Coburn)과 같은 젊은 사진가들의 활동에서 용기를 얻었다.

사진가와 사진 예술에 대한 도움을 준 또 한 사람은 베레나이스 아보트(Bernice Abbott)이었다. 유명 인사의 초상 사진, 건물과 거리의 풍경 등 우수한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업적은 프랑스의 으제느 앗제(Eugéne Atget)의 작품 발굴이었다. 앗제의 사진들은 대예술가의 작품으로서, 설득력 있고 솔직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진을 추구하는 젊은 사진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이 사진만의 독특한 세계를 확립해야 한다고 노력하던 초기에 『스튜디오 원』이라는 출판물은 전 지면을 사진 특집으로 제작한 획기적인 기획을 하였다. 1905년 여름 특별 판으로 간행된 이 잡지에는 스티글리츠, 화이트, 스타이켄, 다이크, 코번 등 많은 사진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사진을 전 지면에 할애한 『스튜디오 원』의 기획은 사진을 독자적인 표현 예술로서 정립하고 이러한 인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투쟁하던 때에 만들어진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진 예술에 공헌한 사진가들 대부분은 화가 또는 예술가들이었다. 스타이켄은 화가였고 만 레이는 사진 측량법을 소개한 예술가였으며 아보트는 조각가, 모호리 나지는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다. 애덤즈나 커닝험, 웨스턴 등은 예술적인 훈련을 쌓았거나 예술가들과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사진가들이었다.

19세기 후반 유럽 사진계는 예술 사진에 심취해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 사진이나 개척 시대의 사진 정신을 이어 받은 기록 사진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자콥 A. 리스(Jacob A. Riis)나 루이스 하인(Lewis W. Hine) 등은 빈민들의 생활상이나 외국 이민들, 노동 현장 등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매체를 통해 보도해 법을 제정하거나 행정 명령으로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이를 활용했다.

미국의 역사적, 사실적 그리고 현실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은 리스나 하인 등의 전통을 이어 경제 공항으로 피폐된 농촌 실상을 기록한 농업안전국(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의 사진 활동에서 꽃피우게 되었다. 1930년대에 미국에 불어닥친 사상 최대의 경제 공항을 타개하기 위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입안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농업안전관리국을 설치하고 자료부를 두어 농촌의 실상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농촌의 피폐 현상을 사진으로 기록한 것은 자료적인 사실을 통하여 정책을 입안한다는 측면과 현장 사진 기록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최선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농업안전국의 다큐멘트는 테마의 근저에 흐르는 문제성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에서 출발하였다. 이들의 집단적인 사진 활동은 사진에 신기원을 이룩하였으며 전설적인 작업이 되었다.

제1,2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란, 6·25 전쟁, 베트남 전쟁은 전쟁을 중심으로 한 전쟁 보도 사진가들의 활약을 눈부시게 하였다. 과거의 전쟁 사진들이 전적지나 전선에서 전개되는 전투나 피쳐(feature) 형식의 사진 방법이었다면 이들 전쟁 사진은 전쟁뿐만 아니라 전쟁에 희생된 병사나 민중 그리고 생활 참상에 초점을 맞춘 휴먼 다큐멘터리였다. 전쟁 사진은 충격적이고도 리얼한 현장감으로 전쟁의 무익함과 인간 존엄성이 주장되었다. 그리고 『라이프』 등과 같은 그래픽 저널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진 저널리즘이 정립되었다.

1924년 독일의 오스카 바르나크(Oscar Barnack)에 의해 개발된 35㎜ 필름 사용 라이카 카메라의 출현은 사진 미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휴대하기 편리하고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롤 필름을 사용하고, 견고하고 밝은 렌즈를 갖춘 라이카는 모든 사진가들이 애용하는 카메라가 되었다. 특히 결정적 순간이라는, 표준 렌즈가 부착된 라이카를 사용하는 데서 얻어진 것으로 사진계에 미친 영향도 대단하였다.

까르띠에 브레숑(Henry Cartier Bresson)은 모든 요소들이 파인더의 시야에 동시에 모이는 순간을 포착하였다. 결정적인 순간은 사진계뿐만이 아니라 박물관, 미술관 사진을 전시하는 화랑에까지 두루 영향이 미쳤다. 심지어 그 유명한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도 부레숑의 사진을 전시한 적이 있는데, 이 박물관으로서는 최초로 전시된 사진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취미나 직업으로 사진에 관여된 사람은 수천 수억을 헤아리게 되었다.

사진은 시각적인 언어로, 창조적인 예술로 깊이 생활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1955년 뉴욕의 현대미술관이 기획 전시하였던 인간 가족전의 감동은 사진의 독자적인 표현 예술로서의 역량을 세계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게 하였다. 이반 드미트리와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기획하였던 ‘회화에 있어서의 사진’ 전람회도 또 하나의 이정표를 기록하였다.

사진이 창조적인 시각 예술로 발전되고 인식의 폭이 넓어진 배경에는 카메라 메커니즘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으며 이 분야는 상대적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무중력 상태의 달에 도달한 우주 비행사들이 촬영한 우주 시대의 사진들은 시각 통신 수단에 또 하나의 역사적 장을 더하여 주었다. 생생한 달 표면을 볼 수 있도록 특별히 제작된 카메라 장비와 전송 시스템은 사진 영역을 더 넓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게 시각 정보로, 예술로, 기록으로서의 쓰임새는 그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어 가고 있다.

한국 사진사

(1) 역사의 원점

사진이란 명칭은 도입 이전부터 사용했다. 사진 발명을 이룩해 낸 유럽에서는 이 명칭을 빛으로 그린다는 포토그라피( Photography)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실물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사()적인 측면과 내면의 정신도 나타내야 한다는 진()의 측면을 강조한 동양 회화 정신의 전신() 철학이 담겨 있는 사진()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사진은 이러한 명칭과 함께 개화 문물로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카메라와 함께 사진술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39년 사진의 발명보다 40여 년이 뒤진 1880년에 와서야 그 실현을 보게 되었다. 다게르의 『다게레오타입의 역사와 설명』이라는 해설서는 불과 5개월 동안에 29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 이러한 전파 과정에서 아시아 지역은 유럽이나 미주 쪽과는 달리 전래의 동시대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문화 영향권에서 단절된 지역적인 특성도 있었지만 국가마다의 서구 문물에 대한 수용상의 제약도 중요 원인이었다. 그러나 일본과 중국은 서구 문물에 대하여 비교적 관용적이었다. 네덜란드 상선과 아편 전쟁으로 인하여 1840년대에 사진술을 수용해 초상 사진 시대가 일찍이 개화되었다.

사진의 전래나 도입은 사진기를 도입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사진을 완성하는 전 과정을 수용했을 때 전래의 의미가 성립될 수 있다면 우리나라의 사진 역사는 1880년대로부터 시작된다. 그렇다고 1880년 이전에는 사진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던가 하면 외국인들이 우리를 기록한 사진 행위도 전혀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1860년경에는 동지사은사로 중국에 갔던 이의익()과 수행원들이 베이징의 러시아인 사진관을 찾아 초상 사진을 촬영한 적도 있다. 이들이 사진을 처음 찍어 본 한국인들임과 동시에 사진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사람들이다. 그 후에도 중국을 방문한 사신들 중에는 사진을 찍는 모험을 감행하기도 하고 또 사진을 간직하고 들어와 주위의 친지들에게 이것을 소개한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미국과 일본의 사진사들이 강화도에 상륙해 신미양요의 전투 장면, 강화도 조약 당시의 현장을 촬영한 적도 있었다.

사진 도입에 관련된 자료는 극히 미미해서 논의가 있을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기록은 한성순보 1884년 2월 14일자의 잡보란에 실린 기사이다. 이 신문에 의하면, “지난여름 저동에 살고 있는 우후를 지낸 김용원이 일본인 사진사 혼다슈노스케를 초빙해서 촬영국을 설치했으며 금년 봄에는 마동에 사는 외무아문 주사를 지낸 지운영 또한 촬영국을 설립했는데 일본에 가서 진술을 배워 왔으며 그 기술이 정교하다.”고 두 사람의 사진관 개업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이 신문의 내용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김용원은 1883년 여름에, 지운영은 1884년 봄에 촬영국을 개설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또 다른 기록에는 김용원이 경상남도 수영의 우후로 재직할 때인 1880년 4월경에 부산의 일본 관리관을 찾아 사진술과 분석술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해 9월에는 부산포의 일본인 거류지에 개업하고 있던 사진사에게 여러 번 찾아다니면서 사진술을 배웠다고 한다.

1880년 이후에는 김용원에 뒤이어 지운영과 함께 황철도 사진술 연구에 열성적이었다. 이들은 사진 도입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선각자이다. 황철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김용원이나 지운영과는 달리 일본에서가 아니라 중국에 건너가 상해()에서 사진술을 습득했으며 사진 문화의 서구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황철이 사진술 습득을 끝내고 사진 기재를 구입해 귀국한 것은 1882년 말경, 양력으로 계산하면 1883년 2월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종로의 대안동, 소안동 그리고 충무로 등지에서 사진관을 개업, 비교적 많은 사진을 남기는 등 활발한 사진 활동을 하였다. 이 땅에 사진 정착을 위해 힘을 다한 사진가 중의 하나였다. 이들 사진 도입의 선각자들, 김용원, 지운영, 황철 등은 사진관을 설립해 초상 사진을 촬영하는 방법으로 민중 초상 사진 시대를 개막했다.

사진 도입의 선각자 중에 지운영도 한국 사진 역사의 초창기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통해 큰 업적을 남겼다. 1882년 겨울, 그는 사진술을 목적으로 일본에 건너가 고배의 헤이무라 사진관에서 그의 말대로 교묘한 빛의 기술인 사진술을 습득했다.

귀국해서는 종로 3가 부근에 촬영국을 설치했다. 여기서 말하는 촬영국은 오늘 우리가 부르는 사진관과 같은 명칭이다. 지운영은 그의 사진술을 공식화하기 위해 당시의 국왕이었던 고종의 어진, 다시 말하면 초상 사진 촬영을 시도, 1884년 3월16일, 고종을 알현하고 어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의 얼굴을 주로 촬영했던 초상사진은 바로 사진도입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으며 사진 풀러스 초상 사진이란 등식이 성립될 정도로 이 분야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초기 초상 사진들은 여러 계층의 사진들을 상대로 한 촬영 활동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사진 기자재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에게는 사진 값으로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보다는 특권층이나 부유층의 독점물로 오랜 기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2) 정착과 발달

사진이 도입되어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이나 사회적인 저항으로 시련과 좌절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수구 세력들이 사진관을 파괴하고 사진을 찍는 행위 그 자체까지도 금지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샤머니즘의 서구 문물 거부는 많은 속설을 만들어 일반 민중들이 사진에 접근하는 것을 경계하고 불행을 예고했다.

사진 기계가 나무에 비추면 나무가 말라죽고 집이나 담에 비추면 집이나 담장이 무너진다던가 풀에 비추면 말라죽는다는 등 죽음을 불러온다는 위협적인 경고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리고 셋이서 사진을 찍으면 가운데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한다던가 부부가 같이 촬영하면 이별한다고 해서 사진을 멀리 하도록 여러 가지 경고를 만들어 냈다.

사진과 샤머니즘과의 충돌이 빈번해지자 이것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외국 세력의 유언비어가 활개를 쳤다.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뜨거운 솥에 삶아서 사진 약을 만들어 사용한다던가 어린아이의 눈을 빼내 사진 박는 기계에 눈을 해 박는다는 유언비어 때문에 서양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적도 있었다. 이것은 열강의 각축 속에서 사진을 유언비어에 실어 자국 세력의 이익을 위해 퍼뜨린 낭설이다.

1895년부터 실시한 단발령은 사진의 정착 그리고 초상 사진에는 새로운 발전적 전기가 되었다. 당시의 국왕인 고종이 솔선해서 상투를 자르고 정부의 대신들도 단발을 하고 일반인들에게도 단발령을 실시되었다. 단발령은 강제로 실시되었으며 유교적인 사회 질서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경향 각지에서 순검을 동원해 강제 삭발을 실시하자 이에 대한 저항이 점차 커지고 급기야는 저항 세력이 결집되어 일본에 저항하는 의병의 봉기로까지 파급되었다. 단발을 강제로 당한 사대부들은 부모나 조상을 대할 면목이 없다고 해서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소극적이지만 외출을 하지 않는 방법으로 단발을 피하기도 했다.

상투를 자르도록 했던 단발령은 여러 가지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을 보존하려는 초상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초상화보다 값싸고 빠른 그리고 정확하게 재현되는 사진을 선택해 자기의 모습을 남기려는 초상 사진에 대한 열망이 커지게 되었다.

(3) 초상 사진·사진관

단발령 사건은 자기의 모습의 변화와 연관된 것이었으며 유교적 사고에서 보면 조상과 연관된 것이었다. 이러한 절실한 문제에 직면해서 초상 사진의 역할이 커지게 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변화 이전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하는 보존 의식에 기인한 것이었다. 초상 사진에 대한 욕구는 초상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진관의 등장을 가속화시켰으며 사진사라는 새로운 직종이 탄생하게 되었다.

1900년대 초에는 초상 사진을 촬영하려는 고객이 사진 도입 이후 가장 많았던 시기로 김규진의 천연당 사진관의 경우만 해도 수백 명이 이곳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끊이지 않는 고객들의 쇄도, 이러한 현상들은 사진관의 제도를 정착시키게 했으며, 서울을 비롯해 지방까지 사진관이 세워져 초상 사진의 대중화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진관 제도와 사진사 중심의 사진 활동은 사진 문화의 모든 것이 이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사진관 제도의 정착으로 기술의 경쟁은 심해졌으며 일반인들에게도 사진은 점차 대중화되어 갔다. 그리고 사진 기술의 보급이 가능한 여러 가지 제도들도 만들어졌다. 와이엠씨에이(YMCA)에 사진과가 개설되고 몇몇 학원에서도 야간에 사진을 가르치는 야간 속성 사진술 강습원들이 개원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사진 교육의 출발이었다.

이 시기는 우리의 사진 활동이 일본의 지배하에서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1890년부터 일본인들이 카메라를 메고 한반도에 건너와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에까지 사진관을 세워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사진 문화가 스스럼없이 이 땅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풍부한 자본으로 대형 사진관을 설립하고 고급 기술을 바탕으로 영업하여 사진계를 장악해 나갔다. 사진의 침략은 191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심화의 정도는 점차 커져 나갔다.

이러한 1920년대에 일본인들 주도의 사진계에 한국적인 사진 문화를 정립할 것을 선언하는 모임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1926년에 창립한 경성사진사협회이다. 여기에서 한국 사단이라는 사진의 정신적 지반이 형성되고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사진 활동이 이뤄지게 되었다. 이 협회의 구성원은 김광배·신낙균·박필호·민충식·박민달·신칠현·이재창 등으로 이들에 의해 다양한 사진 활동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경성사진사협회는 또 예술 사진을 맨 처음 도입하고 사진의 표현 가능성을 예술 사진에서 찾았던 단체였다. 예술 사진은 소재나 촬영 등의 표현 방법보다 인화 방법으로 표출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고무 인화법, 브롬오일, 카본티슈 등의 인화 방법으로 스트레이트한 영상을 회화적인 분위기로 전환시켰다. 인화된 사진은 고상하고 우아한 맛을 풍겼으며 선예한 영상에 싫증을 느낀 사진가들이 연초점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예술 사진의 또 다른 방법은 특수한 인화법의 이용이 아니라 친근감 있는 소재를 아름답게 표출하는 표현 방법에서 찾았다. 풍경을 주로 하는 새로운 사진 사조는 잠시 선예한 영상을 존중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화면의 구성을 그림처럼 아름답고 고상하게 시각적으로는 완벽한 구도주의를 추구했다.

최초의 예술 사진 전람회는 1928년에 개최되었다. 정해창에 의해 처음 마련된 예술 사진 전람회는 동아, 조선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사진을 예술 사진이라고 인식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정해창이 전시한 40여 점의 사진은 인물과 정물도 있었지만 풍경 사진이 더 많았다.

예술 사진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과 함께 이들의 사진에 접목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은 1930년대에 본격화되고 이로써 다양한 사진을 추구하는 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등장 배경에는 카메라 메커니즘의 발달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휴대에 편리한 소형 카메라의 보급, 감량도가 향상된 건판과 필름, 값싼 카메라의 수입 등과 함께 이를 이용하는데 전문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것도 한 요인이 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은 피사체나 표현에 있어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에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표현 영역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실재로는 이러한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항상 예술 사진이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사진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자기 표현이 아니라 형상 공모전에 입상하는데 있었다.

많은 사진 공모전이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부추겼다. 신문과 잡지, 사진 재료상까지도 이러한 행사를 주관했다. 사진의 가치 기준은 바로 사진 공모전의 입상에 따라 좌우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성장은 이들의 단체 구성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만들었다.

1937년을 전후하여 전국의 아마추어 사진 단체는 70여 개 이상이었으며 회원 수도 1천여 명에 달했다. 서울과 부산, 평양, 대구는 물론 사리원, 강경 등 읍 소재지까지도 아마추어 사진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서울의 경성아마추어 구락부, 백양사우회, 인상사진연구회, 사구회, 평양의 오월회, 대구아마추어 구락부 등은 당시대의 사단에서 주목을 끌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 말기는 사진 활동의 암흑기였다. 일제는 중일 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행정 처분, 요새지대법, 군기밀 보호법, 치안 유지법 등의 법령으로 사진 표현과 활동의 자유를 규제하고 탄압했다. 전시회나 단체의 집회는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었다.

요새지대법에 의해 사진 촬영 행위도 규제 대상이 되었다. 50미터 높이의 건물이나 산 등 높은 곳에서 부감으로 촬영한다거나 요새지나 바닷가의 촬영은 철저하게 금지했다. 필름과 인화지 등 사진 재료는 배급제를 실시했으며 사진가들에게는 선전 선동적인 사진 제작이 강요되었다. 이러한 극심한 탄압과 규제 속에서 허용된 것은 민속이나 토속적인 소재였다. 이러한 풍물 사진의 권장은 현실에 대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려는 일제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4) 8.15 해방과 사단의 재편성

1945년 8월15일 해방. 이민족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편협한 사진 활동, 일본을 위한, 일본의 지배하에서 사진을 해왔던 친일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리가 주체된 사진 환경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사진인들은 새로운 시대에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사단을 재편성하고 여러 가지 사진 행사를 개최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진계는 과거의 사진 활동에 대한 반성이라든가 청산을 통해 일제 잔재를 극복하려는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해방이라는 역사의 전환이 이루어 졌음에도 사진의 방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일제 강점기의 사진을 리바이벌하는 것처럼 과거 일인들과 함께 해 왔던 사진적 경험이 기준이 되고 평가의 척도가 되었다. 여기에 창작 활동의 절대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진 재료의 품귀 현상이라는 일제가 남긴 또 하나의 유산도 물려받게 되었다.

해방 공간의 어려운 상황에서 사진인들은 새로 사진 단체를 결성하고 여러 사진 행사도 기획했다. 1945년 9월 조선사진예술연구회가 창립된 데 이어 서울인상사진연구회·서울사진가협회·전국사진가연합회 등이 서울에서, 평양사진가협회·경북사진문화연맹·부산예술사진연구회·전남사진연구회 등이 지방 사진 단체로 조직되었다.

조선사진예술연구회는 1945년에 이어 1946년에도 회원 작품전을 열었으며, 전국에 사진을 공모하는 제1회 예술사진전람회를 주최했다. 또 자유신문사도 해방 기념 전국사진공모전을 개최했는데, 이 두 사진 행사가 해방 이후 모든 사진인들의 관심 속에 열린 전국 규모의 공모전이었다.

(5) 사진 표현의 새로운 모색

해방 이후 사진인들의 관심사는 에술 사진이었다. 예술 사진이라고 해서 어떠한 미학이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마추어 사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이 관행처럼 되었다. 이 예술 사진은 사진인들을 만족시킬 만한 이름이었으나 무엇이 예술 사진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술 사진인지 이에 대한 과제나 대책은 전무했다.

해방 이후 사진계가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이유 중에는 명목뿐인 예술 개념에 있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하에서 민족 사진을 굳건하게 지킨 사진가들이 없었다는 점도 그 하나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었다.

1948년 해방 이후 최초로 열린 임석제의 개인 사진전은 여러 가지 화제를 남겼다. 한 평론가는 이 전시회에 대해, “일제가 남기고 간 사진 예술의 애매한 정의를 용감히 부정하고 참된 민족 예술 정신에 입각한 사진 예술의 장르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작가적 양심의 각성” 또는 “과거의 태도 즉 섬세하고 감각적인 낭만적 분위기를 탈각하여 강직하고 현실적인 리얼리즘에 살려고 투쟁하는 고민과 의지가 보이는 작품”이라고 다소 선언적인 내용의 평이지만 리얼리즘 사진을 거론한 것은 처음이었다.

임석제의 사진에는 광산 노동자, 부두 노동자들, 생활의 근저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소재로 한 점과 이러한 소재를 작가의 내면 세계에서 여과한 사실적인 사진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면은 거칠고 미화되지 못한 생소한 표현이었지만 인간의 삶을 언어적인 메시지 속에 포함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사진 활동은 다큐멘트 방법으로 시대의 사건 현장을 보고하려는 방법의 출현이었다. 해방의 감격적인 순간의 기록에 이어 이경모의 여순 사건 현장의 다큐멘트는 이 사건이 남긴 이념 분쟁의 참혹하고 처절한 상황을 위험을 무릅쓰고 극명하게 포착한 작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첫 페이지가 되었다.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은 사진계에 많은 변화를 불러왔다. 전쟁 발발 이후 국방부 정훈국은 사진대를 조직 현역 군인을 정점으로 일반 사진가들이 참가, 전쟁을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휴전이 될 때까지 계속했다. 초기에는 수명에 불과했던 종군 사진대는 점차 많은 사진가들이 참가했다. 종군 사진가들은 전투 현장에서 피해 가지 않는 총탄 사이로 비정한 전쟁을 기록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6·25 전쟁의 체험이 남긴 또 하나의 변화는 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자각이었다. 1952년 피난지 부산 국제구락부 화랑에서 한국사진작가협회 창립 회원전을 개최한 회원들은 그들의 사진 속에 완결하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사진에 대한 반성과 새롭게 리얼리즘 사진 표현을 다같이 표방하고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의 자각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 파장은 결코 적은 것은 아니었다.

피난지 부산의 사진 활동에서 또 하나의 기록적인 사실은 해외 사진전에의 진출이었다. 1952년부터 시작된 국제 사진전 진출은 초기에는 출품의 열의와는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는 50여 개국에서 4천여 점의 작품이 입선되는 등 한국사진의 국제 진출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사실주의 사진 운동과 국제 사진전 진출은 사진의 새로운 가치관 정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외국 사진 사조를 유입하고 국제 사진전에 진출 등으로 해서 1950년 후반에서 60년대의 사진은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특히 그 영향이 컸던 사진전은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이 개관 기념으로 기획한 인간 가족전의 국내 순회 전시로 불확실한 우리의 사진 미학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1957년 4월1일부터 25일까지 경복궁 미술관에서 개최된 순회전은 무려 30여 만 명의 관람객이 입장하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 6·25 전쟁의 쓰라린 아픔, 부산 피난지의 사진 활동 등에서 촉발된 의식은 인간 가족전과 사진 저널리즘의 영향으로 새로운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1956년에 등장한 신선회는 이듬해 회원 작품 38점과 공동 테마로 창작한 시장의 생태를 촬영한 사진도 함께 전시했다. 비평가들은 시대정신에 바탕을 둔 작품으로 회화적인 표현 방법을 초월한 깊은 내용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신선회 회원들의 관심은 인간 생활이었다. 즉 전쟁 후의 폐허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삶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공통된 관심사였다. 현실을 직시하고 생활의 현장 속에서 인간의 삶과 생활을 통해 메시지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들이 표방한 사진의 내용이었다.

(6) 1960, 70, 80년대

1950년대를 지나 1960년 초기는 매체 사진의 역할이 유감 없이 발휘해 된 시기였다. 특히 4.19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매체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실의 확증과 부정의 현장을 포착한 수많은 사진이 매체에 반영되었다. 사건의 현장에서 목격자로서 사진 기자들은 불의에 대한 고발과 직설적인 카메라워크를 인쇄 매체에 의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시대의 목격자로서 충실하게 현장을 지켰다.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과 경무대 앞의 시위대 발포 등 현장 기록은 생사를 초월한 사진기자 정신이 성취한 특종 사진으로 혁명을 촉진하는 기폭제 역할이 되었다. 4·19 혁명의 전 과정은 사진 기자들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리고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으며 사진 기자들은 정권 붕괴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매체 사진은 4·19 혁명을 통해 그 역할과 임무가 무엇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발견했다. 현실적인 것과 역사적인 것 그리고 보도 사진가의 시각은 진실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공모전의 공과는 여러 측면에서 판단될 수 있으나 이러한 경향은 사진 활동의 전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랜 공모전 중심의 사진 활동에서 얻어진 인습은 오히려 창작 활동을 단순화시키고 과거의 예술 사진이 남겼던 파행적인 유산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럼에도 1960년 이후의 사단은 공모전 중심의 사진 활동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사단은 6·25 전쟁 이후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한 리얼리즘 사진과 예술 사진으로 알려진 기존의 살롱 픽처를 선호하는 작가들로 양분으로 시작된다. 이들 사이에는 경쟁과 비난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편을 가르는 것처럼 사진인들은 이를 중심으로 해쳐 모이게 되었다. 국전의 사진 부문과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양극화 현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1964년 제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사진 부문이 참가하게 되고 1963년 12월에는 첫 동아사진콘테스트 입상 작품전이 열렸다. 그리고 국제적인 사진 행사인 동아국제사진살롱도 개최되는 등 많은 공모전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들 공모전의 성격에 따라 사진의 경향도 좌우되었다. 국전이 회화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면 동아사진콘테스트는 생활과 인간의 리얼한 표현과 내용에 바탕을 두었다. 작가들은 이러한 상반된 경향에 좌우되어 동일한 작가가 서로 다른 공모전에 이름을 날리는 예는 얼마든지 있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새롭게 광고 사진이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의 정권이 추진한 근대화는 농업 중심에서 공장생산 구조로, 그리고 인구의 이동과 소비의 패턴도 바뀌게 되었다. 대량 생산의 대량 소비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게 되었으며, 소비를 촉진하는 선전과 광고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광고 사진은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시대가 만들어 낸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총아였다.

사진은 취미라든가 예술로서 이해하던 시대에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광고 사진 분야가 정착되고 광고 사진가들의 역할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1977년에는 수출이 1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광고 사진계가 엄청나게 확장되었다. 그래서 광고 사진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충무로에 50여 개의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많은 광고 사진가들이 활동의 무대를 넓혀 나갔다.

산업화 시대와 함께 밀려온 사진 환경의 변화는 흑백과 컬러 사진이 공용되기 시작해 나중에는 컬러 필름이 흑백을 대신해 사진 의식 변화가 뒤따르게 되었다. 특히 산업 시대에 등장한 광고 사진과 패션 사진 분야는 컬러 사진 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컬러 필름과 함께 오토 포커스 구조를 갖춘 소형 카메라의 대량 보급은 폭발적인 사진 인구의 증가를 가져왔으며 사진의 생활화, 대중화라는 사진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카메라가 일반 모두의 표현 도구가 되면서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활동과 규모가 점점 확대되고 이들이 사진을 주도해 나가는 세력으로 커지게 되었다.

이 시대에 와서 중요 사진 수용 계층으로 등장한 것은 가족 단위의 소비 계층이었다. 1960년대부터 카메라의 대중 보급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 단위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었다. 또한 산업 사회가 심화되면서 여행과 여가를 즐기는 일들이 동시성을 가지고 어울러지면서 스스로 자신과 가족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기념 사진이 사진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진 인구의 증가는 사진 제작 시스템을 변화시켰으며 사진의 소비를 엄청나게 증가시켰다.

참고문헌

  • 『대한매일신보』(1908∼1909)
  • 『동아일보』(1930.2.13.)
  • 『한성순보』-제15호
  • 『춘추관집』(지운영)
  • 『한국현대미술사』-사진-(국립현대미술관, 1978)
  • 『세계의 사진사』(버몬트 뉴홀, 최인진 역, 서문당, 1978)
  • 『신선회사진전평』(조명원, 사진문화, 1957.4.)
  • 『사단의 당면과제』(구왕삼, 사진문화, 1948.12.)
  • 『사진학개설』(신낙균, 1928)
  • 「M1소총보다 더 무거웠던 라이카 ⅢB」(이경모, 『영상』, 1975.5.)
  • 「탄은문월도」(전형필,『고고미술』7, 1961.2.)
  • A Concise History of Photography(Helmut and Alison Gernsheim)

관련이미지 (3)

사진관 스튜디오(1930년대)

사진관 스튜디오(1930년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3
  • 사진관 스튜디오(1930년대)
  • YMCA 사진과 실습실(1910년대)
  • 정해창 예술사진전
위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출처사이트 게시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사용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 같은 의미 표제어 - 필름의 광학 현상을 이용하여 피사체를 기록하는 일 (11) 도움말 보기

  • 사진 이미지
    두산백과 | 사진 [寫眞] | 조회 8,913

    사진술은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과학인 동시에 또한 예술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반된 복합성은 사진의 예술성을 논할 때 이제까지의 예술개념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본디 사진은 회화의 복제수단(複製手段)으로 발명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즉 일찍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오늘날 사용하는 카메라의 원형인 카메라 오브스큐라(camera obscura:어둠상자)를 그림을 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복제도구로 썼다. 회화의 복제기술로는 또한 일찍부터 판화(版畵)가 있었는데 판화기술은 18세기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랐다. 이는 근대 시민사회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부유층의 회화(繪畵) 소유열에 호응하는 풍조의 발현(發現)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풍조 속에서 보다 더 정밀하고, 다량의 복제가 가능하면서도 값이 저렴한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신흥세력인 부유층은 매우 환영했다. 이렇듯 사진은 애당초 새로운 판화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므로 사진이 대상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재현하는 데 대하여 감탄하면서도 정신적인 연장(延長)으로 심신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계적 조작이라는 데 혐오감을 가졌다. 복제의 상대개념은 오리지널(original)로서, 그것은 일품 일회성(一品一回性)을 그 본질로 하며 독창적인 것이다. 예술은 바로 오리지널 그 자체이다. 그러나 W.벤야민이 말한 대로 문명의 발달로 새롭게 등장한 복제기술은 ‘지금’, ‘여기’밖에 없는 일품 일회성의 오리지널에 대한 신화를 깨뜨리고 근대사회의 시민들이 눈뜬 평등의식과 직결되었다. 이런 점에서 사진은 현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하나만의 일회성을 본질로 삼은 지금까지의 예술의 틀에 들어맞지 않는 특수성이 본디부터 있었다. 벤야민의 말대로 복제기술의 등장은 또한 대중의 예술에 대한 예배적 태도에 타격을 주었으며, 한편, L.멈포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대에 있어서 복제품의 범람은 오리지널에 대한 관심이 무디어지는 경향을 낳았다. 그러나 사진의 등장 이후 영화 ·레코드 ·텔레비전 등 기계예술은 모두 예술의 복제수단이면서 오늘날에 있어서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새로운 예술로 제자리를 굳혔으며, 지금은 사진이 다만 예술의 복제가 아니라 복제예술(複製藝術)이라는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사진도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에 그 과학적 특성은 당연히 종래의 예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표현상의 분야를 개척하여 새로운 표현성의 리얼리티를 확립했다. 즉, 첫째, 렌즈는 인간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현실의 심부를 물리적 정확성으로 반영한다. E.웨스턴은 렌즈가 눈보다 더 잘 본다고 말했다. 둘째, 카메라는 인간의 고정된 시점(視點)을 해방시켰다. 카메라는 인간이 그 자리에서는 볼 수 없는 먼 공간도 끌어당긴다. 이제 공간은 렌즈 앞에 자유자재로 끌어당겨지기도 하고 늘여지기도 한다. 셋째로 사진은 모두가 과거에 일어난 사실들의 표상(表象)이요, 현실에서 사라져간 시간이 항상 현재라는 시점에서 재생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시간개념을 일깨워주었다. 운동은 모두 시간성을 띠게 되고, 또 운동이란 사물이 변화하는 과정이며, 시간은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재는 자인 동시에 개념인데, 스냅 사진은 눈으로 분별할 수 없는 운동하는 사물의 순간들을 다양하게 포착하는 데 성공하였다. 넷째,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 대상의 모습이 무한히 변화하고, 그 변화에 따라 대상이 갖는 의미도 달라지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상에서 말한 여러 특성, 즉 사진적 표현의 리얼리티의 핵(核)은 기록성이며, 이 기록성에 의해 L.모호이너지가 말한 “사물의 순수객관적 파악”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또한 크라카우어의 말과 같이 아직, “체제화되지 않은 미분화된” 현실대상이 사진의 표현세계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또한 영상의 표현성의 리얼리티를 강하게 드러내는 것은 현재성(現在性:actuality)이며, 이것이 수용자(受容者)로 하여금 표현된 세계로의 감정이입(感情移入)을 촉발하는 커다란 요인이 된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대리체험적 수용의식(代理體驗的受容意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전쟁사진에서 받는 강한 충격은 사진을 보는 수용자가 전쟁사진의 상황 속에 말려들어가 의사적(擬似的)인 상황의 체험을 하는 데서 촉발된다. 이러한 일은 지금까지의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의식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또한 사진에 의한 기록적인 재현의 영상은 사물에 대한 인간의 기억상(記憶像)의 애매함을 충분히 일깨워주며, 또한 흐린 기억의 모호함이 이리저리 겹쳐서 생긴 어떤 사물에 대한 뿌리깊은 잘못된 고정관념도 깨지게 된다. 지금까지 사물과 인간 관계, 즉 사물에 대한 의미의 부여는 언어기호(言語記號)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언어는 판에 박힌 듯 상투적이므로, 사물의 의미가 자칫 잘못 굳어버리기가 쉽다. 그러므로 사진이 순수객관적인 제모습을 드러낼 때에 인간과 사물의 잘못 굳어진 의미는 흔들리고, 또한 부정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이처럼 언어와 같은 개념기호(槪念記號)는 아니지만, 개념기호를 경신(更新)시키는 새로운 기호로서의 본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 사진 이미지
    어린이 음악미술 개념사전 | 사진 - 빛으로 그려낸 또 하나의 예술 | 조회 5,369

    학교에서 돌아오니 할머니가 와 계셨어. 할머니와 오랜만에 가족 앨범을 꺼내 보았어. 배시시 웃는 아기의 모습, 자장면을 온 몸에 묻히며 먹는 모습, 운동회 달리기에서 꼴찌로 들어오는 모습 등 내가 자라온 모습이 사진 속에 그대로 남아있었어. 그중 얼마 전에 다녀온 단양의 자연 풍경이 담긴 사진은 마치 산과 호수와 노을이 한 폭의 그림 같았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 낸 사진도 미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진의 뜻과 카메라 옵스쿠라 - 베껴 낸다, 빛으로 그린다] 빛으로 대상을 베끼다. 사진은 한자로 '寫(베낄 사)', '眞(참 진)'으로 '참인 것을 베낀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사진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과 '복사된 사물'의 관계가 있어. 또한 사진은 영어로 photography라고 하는데 'photo(빛) +graphy(그리다)'가 합해진 말로 '빛으로 그리기' 라는 뜻이야. 즉 사진은 렌즈 앞에 놓인 대상으로부터 반사된 빛을 그대로 베끼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어. 회화를 그리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된 사진 현재 사용되는 '카메라'의 시초는 '카메라 옵스쿠라'(라틴어로 Camera는 방, Obscura는 어두운, 어두운 방)라고 할 수 있어. 카메라 옵스쿠라는 어두운 방의 한쪽 벽에 작은 구멍을 통해 새로 들어온 빛이 방 바깥 편에 서 있는 영상을 방 안 맞은 편 벽에 거꾸로 비추는 거야.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 카메라 옵스쿠라를 그림을 정확히 그리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사용했어. 이렇듯 처음에 사진은 판화처럼 그림을 복제하는 하나의 도구로 받아들여졌어. 읽을 거리 최초로 사진이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사진 발명의 시점은 정확하지 않아. 일반적으로는 1839년에 발표한 다게르(Louis - Jacques Mande Daguerre)의 사진을 그 출발점으로 보는데, 실은 이 사진 작품보다 더 앞선 작품이 있어. 바로 1826년경에 제작된 니엡스(Joseph - Nicephore Niepce)의 <르 그라 Le Gras의 창문에서 본 '조망'>이야. 그러나 이 사진은 불분명하고 흐릿한 이미지로 인해 완전한 하나의 사진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었고, 니엡스는 기술의 발전을 꾀해야 했어. 따라서 이를 보완하여 독점권을 갖고 사진의 발명을 공표한 다게르가 우선권을 얻은 셈이었지. 그러나 니엡스의 사진은 광학과 화학의 방법으로 현실을 기록한 최초의 사진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커. [예술 사진의 3가지 종류 - 예술적 시각에서 미적 감동을] 사진은 예술적인 의도에서 찍는 경우와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있어. 예술적인 의도에서 찍는 경우는 다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어. 사진으로 만드는 조형 사진은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에 그 전의 미술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분야를 개척하여 새로운 조형성을 만들었어.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실험적인 사진이 나왔고 그 실험에 의해서 예술적 가치를 지닌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어. 사진만의 고유한 특징을 이용한 여러 예술적 실험이 계속 되었는데 매크로 촬영에 의해 발견된 사물의 새로운 영역, 앞에서 본 경치와 배경의 극단적인 대비, 그리고 여러 사물 이미지를 나란히 설치함으로써 얻어지는 역설적인 효과 등이 예술의 영역에서 실험됐지. 현재는 포토샵과 같은 디지털 이미지기술로 더욱 쉽고 다양하게 이미지를 생산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술이 오히려 사진의 개념을 바꿔 놓고 있어. 최근에 디지털 사진 작가들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표현 방식을 넘어 낯설고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만들어 보여 주기도 해. 그들은 인간이 표현하려는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예술이 줄 수 있는 감정의 다양성을 제시하고 있어. 사진의 결합으로 만드는 새로운 이미지 프랑스어 '몽타주(montage)'는 '같이 놓고 조립하다.'라는 의미이므로, 포토몽타주는 잡지 등의 대중 인쇄 매체에서 따로 따로 오려낸 사진과 문자들을 조합하는 것을 말해. 서로 관계없는 이미지를 결합해 현실에서 있을 수 없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어. 사진기 없이 사진을 찍는 포토그램 포토그램은 사진이 처음 나올 때부터 존재한 오래된 기법이야. 인화지와 현상 약만으로 물체를 찍어내는 사진 기법을 이용해 사진기 없이 사진을 찍어. 인화지에 찍고 싶은 물체를 얹어 두고 빛을 쪼이면 물체의 외곽선과 투명도에 따라 인화지에 실루엣이 맺혀. 포토그램은 마치 X-ray 사진처럼 빛이 쪼이는 인화지의 부분은 검게 나오고, 물체가 가로막은 부분은 흰색으로 나와. 또한 빛이 통과할 수 있는 부분은 그 정도에 따라 다른 명도의 회색 그림자로 표현돼. 포토그램 작품들은 사진기로 찍어낸 사진처럼 세부적으로 형태를 보여주지는 못해. 하지만 외곽선과 색의 농도만으로 형태가 표현되어 보통의 사진보다도 추상적이고, 암시적인 인상을 줘. 더 알아보기사진과 미술 사진 작가들은 사진이 미술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애썼어. 사진을 회화처럼 그리듯 찍었던 초기 사진 작가들이 특히 그랬어. 하지만 장인적인 노력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결합돼야 창조적인 미술 작품이 탄생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렌즈와 필름의 기계적인 우연성이 만들어 놓은 사진은 결코 미술일 수 없었어. 이는 사진이 발명됐을 당시보다 사진이 수많은 일반인의 취미로 애용되는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사진이란 필름의 수작업이라는 고된 과정을 거쳐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지. 그러나 우리 시대의 미술을 생각해 보렴. 미술이기 위해 반드시 그런 노고와 정신적 고뇌가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카메라의 시초 카메라 옵스쿠라는 사진이 발명되기 오래 전부터 많은 화가들이 드로잉하는 도구로 이용해 왔지. 많은 화가들은 카메라 옵스쿠라를 원근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생각했다. 다게르

  • 세계문화사전 | 사진 | 조회 3,297

    어떤 사회에선 카메라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일부 사람들이 카메라가 자신들의 영혼을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1880년대의 조선에서도 그랬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사진관이 분노한 군중들의 표적이 된 것은 사진을 일본 문물로 오해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 사진이 수명을 단축하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다 삶아서 사진약으로 쓴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사진과 관련된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는 후일 주미공사 박정양이 미국과 200만 불 차관 교섭을 할 때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윤덕한에 따르면, “조선과 관련해서 또 다른 끔찍한 내용이 미국 신문에 보도되었다. 백인들이 조선의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눈을 도려내 사진기의 렌즈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끓여서 약으로 먹고 있다는 소문이 서울에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보도는 미국의 금융업자들로 하여금 조선을 완전한 미개국으로 인식토록 하기에 충분했다. 이후 광산개발 투자와 차관교섭은 시들해지고 결국 중단되기에 이른다.” 서양에서 카메라 발명 초기엔 카메라 앞에서 모든 것들은 다 평등했다. 사진의 초창기인 1852년 허만 멜빌은 “그때 나는, 옛날에는 좋은 초상화는 부자나 아니면 정신적으로 귀족적인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데 반하여, 사진은 얼마나 빨리 모든 사람의 꼭 닮은 초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됨에 따라 자명하게도, 전에는 천재를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초상이 이제는 둔재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초기에 사진은 예술의 경쟁 상대로 여겨졌다. 실제로 사진은 그 시초부터 예술의 대용물이 돼 초상화가들을 실업자로 전락시켰다. 보들레르는 1859년에 쓴 「현대 대중과 사진」이라는 글에서 사진을 ‘예술의 숙명적인 적’으로 간주하였다. 사진은 그전보다도 더욱 더 정확하게 ‘진리’를 제시하기 위해서 실체를 재생시킬 능력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술의 목가적인 개념에 집착했던 보들레르는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쓸모 없고 지루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는 분명히 사소한 것보다는 나의 환상이라는 괴물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보들레르는 화가들이 사진의 영향을 받아 점점 더 “그가 꿈꾸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는 것을 그리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후 전개 양상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수잔 손택은 사진은 한때 그림의 불구대천의 원수로 생각되어졌지만, 오늘날 사진술 덕택으로 충실한 묘사라는 고역에서 해방된 그림은 좀 더 고상한 일인 추상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존 버거도 사진기의 발명이 보는 방식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보여진 대상이 우리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었으며, 이런 변화는 회화에도 즉각적으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진은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윤병철에 따르면, “예술가들의 실물에 가까운 묘사는 더 이상 그 필요성을 잃게 되어 예술에 있어서의 내적 창조의 과정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또는 자신의 주관적 관점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서양의 화가들은 사실주의적 경향이 퇴조하고 인상주의와 추상주의에 몰입하게 되었다. 한편 시인과 소설가들 또한 사건의 흥미진진함에 몰두하여 현상을 정교하게 묘사하기보다는 현실을 통찰하거나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정신의 내면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전통적으로 사실적 그림보다는 관념적 그림을 선호했던 동양의 예술가들에게는 사진의 출현이 서양에서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근대 미학은 다른 감각들보다 시각에 더 우위를 둬왔다. “시각적인 것은 곧 증거이다”라거나 “보는 것이 곧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그걸 잘 말해 준다. 그러나 사진 매체의 포스트모던적 이용은 그러한 ‘상식’에 도전해 사진의 이중성을 보여 주려는 시도를 한다. 그것은 근대미학의 객관성, 투명성 신화를 전복시키기 위한 것이다. 사진은 ‘동작의 회복’을 가져 왔다. 윤병철은 사진의 출현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동작은 물론, 인간의 정신적 자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자신의 포즈를 가다듬고 위치를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표정이나 메이크업에까지 신경을 쓰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의식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울은 순간적인 자신 모습의 소외이지만 사진은 영원한 자신의 모습의 소외여서 자신에 대한 성찰을 강화했다. 문자에 의해 인간의 소리와 동작이 탈취당하였으나 사진에 의해 인간의 동작을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으로 말미암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동작의 시대’, ‘마임(mime)의 시대’, ‘댄스의 시대’로 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융과 프로이트가 활약했던 시대도 바로 사진의 시대였던 것이다. 사진에 나타나는 뚜렷한 ‘자세’의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꿈과 일상생활의 행위에 나타나는 개인적인, 집단적인 ‘자세’와 ‘동작’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1965년에 낸 『사진』이라는 책에서 사진이 가족 성원을 가족에 통합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사용된다고 주장했다. 나이가 든 독신자들은 그들의 가족으로부터 유리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으며, 대부분의 사진은 여전히 가족 행사에서 촬영된다는 것이다. 손택은 1978년에 낸 『사진론(On Photography)』이라는 책에서 예술의 장식적 효과가 강해지면서 사진이 발달되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일반적으로 사진을 이용하게 된 것은 가족이나 어떤 단체의 구성원인 개인의 업적을 기념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으며, 그것이 바로 사진이 갖는 가장 대중적인 용도였다는 것이다. 손택은 여행은 무엇인가를 사진에 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노동 윤리가 냉혹한 사람들일수록 사진찍기에 더욱 집착하는데, 그건 그저 일만 몸에 배어 버린 사람들은 휴가 중이나 휴일 같은 시간에 일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사진기를 들고 어디로든 나가 부지런히 찍음으로써 무엇인가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택은 대개 과거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열심히 사진을 찍어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화된 사회에서 살다 보면 으레 과거를 포기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특히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과거와의 단절이 훨씬 더 심각하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0~60년대에는 달러를 싸들고 다니며 속물 근성에 푹 찌들어 버릇없이 구는 미국인 관광객 이야기가 안줏거리였다면, 1970년대 초에는 엔화 가치가 과대평가되는 기적 덕택에 감옥 같은 섬에서 풀려 나와 양쪽 엉덩이에 각각 한 대씩 카메라 두 대를 넣고 다니며 신기할 만큼 집단으로 행동하는 관광객 이야기가 안줏거리였다.” 80년대엔 어느 나라 사람들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90년대는 한국인들이 그런 안줏거리가 됐음직하다. 그러나 미국인·일본인·한국인만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영국의 버트런드 러셀이 1931년에 쓴 「관광객」이라는 제목의 글은 다음과 같은 개탄으로 시작하고 있다. “희한한 일이다. 우리가 집에 있을 때는 더할 수 없이 매력적인 사람들인데 해외로 나가기 무섭게 대다수가 끔찍한 사람들로 변해 버린다. 미국에 온 영국인 여행객들이 오만하게 굴고, 아무 근거 없이 사람을 얕잡아 보고, 미국 문명의 아주 중요한 장점들을 보려 하지 않아 내가 얼굴이 화끈거렸던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손택은 사진이 향수를 북돋우는 기능에 주목했다. 손택이 보기에, 사진은 애수적인 예술이며 환상의 예술이다. 사진에 찍혔다는 것은 찍혔다는 그 사실로써 이미 애수를 띠게 되며, 추악한 피사체나 기괴한 것도 사진가가 주의를 기울였다는 사실로 고귀해지기 때문에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손택은 사진의 중요성을 전기에 비유하였다. 사진이나 전기가 없었더라면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택은 사진이 하나의 ‘문법’이며 ‘보는 일’에 대한 윤리라고 보았다. 사진을 찍는 작업은 피사체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며, 세계와의 일정한 관계에 자기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의 수준을 넘어선 의미도 있다. 손택은 사진 촬영이 공격적·성적 행위라고 주장했다. “카메라를 사용할 때에는 항상 공격성이 내재한다”는 것이다. 사진과 관련된 언어부터가 그렇다. “카메라를 남자들의 발기된 성기에 비유하는 것은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은유를 경박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카메라에 ‘(필름을) 넣는다(loading)’, 카메라를 들고 ‘겨냥한다(aiming)’, 필름을 ‘박는다(shooting)’라고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카메라와 관련된 환상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정작 자신들은 그런 환상을 잘 알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이다.” 손택은 더 나아가 “사람들을 촬영하는 것은 그들을 폭행하는 것이다”, “총이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사람을 중독시키는 환상적인 기계이다”, “누군가를 촬영하는 것은 고상한 살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손택은 “사진기는 경험을 축소화하고 역사를 구경거리로 변질시킨다”고 말한다. 에스텔 주심의 해설에 따르면, “수잔 손택은 아우슈비츠를 담은 사진들은 자신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고 밝혔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애처로운 참상을 즐기지 않으며, 그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이 외면하도록 만든다. 비인도적인 행위가 폭로되면서 더해지는 자책감과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보다는 참사에 관한 정보를 억제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더 쉽다. ······ 필요한 것은 사진이 어떻게 기적과도 같이 고통스러운 정보를 긴밀한 사회운동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지에 관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사진은 자주 텔레비전 영상보다 더 강력하다. 손택은 사진은 어떤 순간을 특권화해 놓은 것으로서, 그 순간을 계속 간직한 채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는 얇은 사물로 뒤바꿔 버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베트남전쟁 당시 전쟁의 만행을 수백 시간 보여 준 텔레비전보다 훨씬 더 반전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던 것은 아마도 1972년 세계 모든 신문의 제1면을 장식했던 사진, 즉 미군의 네이팜탄에 맞은 뒤 두 팔을 벌린 채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도로로 뛰어나오던 어느 벌거벗은 베트남 어린아이의 정면 사진이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10여 년 뒤에 발생한 베트남전쟁에서보다 생태계 파괴와 집단학살이 훨씬 더 철저히 이뤄진 한국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면, 미국인들이 그토록 한결같이 한국전쟁을 묵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점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그런 사진이 설 만한 자리가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대중도 그런 사진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4·19 혁명도 한 장의 사진이 만들어 낸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김진배는 4·19 혁명에 대해 “무엇이 이토록 만들었는가. 부정선거인가, 학생들의 정의감인가, 권력 내부의 혼선인가, 이승만의 고령인가. 그런 것들은 결정적 요인이라 보기 어렵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문에 난 ‘한 장의 사진’이 역사를 바꾼 것이다. 뒤통수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16세 소년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러한 사진이 부산의 신문에 그치고 서울의 신문에까지 나지 않았다면 그 4월의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다. 들고일어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혁명은 유권자에게 투표 용지를 주지 않고 공개투표·사전투표를 자행하던 그 순간에 몽둥이를 들고서라도 폭발했어야 했다. 마산에서 벌써 ‘부정선거 다시 하라’, ‘발포 경관 처단하라’ 소리가 나오는 데도 서울은 3·15 이후 34일 동안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손택은 “사진은 일종의 과장이요, 물질 세계와의 영웅적인 결합”이라고 지적하면서 자본주의 사회가 본질적으로 영상에 입각한 문화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구매력을 자극하여, 계급과 인종과 성의 상처를 마취시키기 위하여 대량의 오락을 제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손택은 모든 것을 촬영할 필요가 있다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소비 그 자체의 논리에 있다고 말한다. 소비한다는 것은 불태우고 다 써버리는 것이며, 따라서 보충될 필요성이 있음을 뜻하는데, 우리는 영상을 만들어 소비함에 따라 연이어 영상이 또 필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영상의 악순환’이라고나 할까? 손택은 오늘날 세계는 사진으로 뒤덮여 있고 인간은 영상에 중독되어 욕구조차 둔화되고 영상의 자극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보다 더 실감나는 사진을 요구하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활 깊숙이 영상과 접촉되는 빈도가 많아지고 자극의 빈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영상이 가지는 마력도 이에 비례해서 커져만 간다는 것이다.

'사진' 연관인물 (26) 도움말 보기

  • 황철 [黃鐵] | 두산백과

    한국의 사진가·서화가·문신이다. 우리나나 최초로 사진을 도입하여, 중요한 기록사진을 다수 촬영하여 그 시대를 조감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남겼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야조(冶祖), 호는 어문(魚門)·무명각주(無名閣主)이다. 한성부(漢城府)에서 태어났다. 자헌대부 규장각제학 윤수(潤秀)의 둘째아들이다. 1882년 중국을 여행하던 중 상하이[上海]에서 사진 촬영술을 익히고 사진기를 구입하여 귀국 후 자택의 사랑채를 개조하여 촬영소를 설치하였다.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개화파(開化派)로 지목된 그의 사진관을 격분한 군중이 난입하여 사진 기재를 파괴하였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다시 상하이에 가서 사진 기재를 구입하여 1886년 귀국, 영선사(領選使)였던 김윤식(金允植)의 집을 매수하여 사진관을 개설하였다.1895년 포천군수(抱川郡守)에 임명되었으나 송금법(松禁法)을 어긴 국왕의 근친에게 장형(杖刑)을 가한 사건이 수구...

    연관인물 황철 더보기
  • 김영갑 [金永甲] | 두산백과

    한국의 사진작가. 2005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이어도를 주제로 연 마지막 개인전까지 총 1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집으로 《마라도》,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등이 있고 사진수필로《그 섬에 내가 있었네》를 출간하였다. 2003년 이명동사진상 특별상을 받았다.. 1957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나, 서울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때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형으로부터 카메라 한 대를 선물받은 이후,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진관에서 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사진 기술을 익혔다. 이후 대학 진학도 포기한 채 프리랜서 사진작가를 꿈꾸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1982년 우연히 제주도에 들렀다가 제주의 때묻지 않은 자연에 매료된 뒤, 1985년에는 가족과 인연도 끊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아예 제주에 정착해 사진 찍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 뒤 제주의 자연을 필름에 담기 위해 사시사철 밤낮 가리지 않고 제주 전역을 샅샅이 훑었고, 사진 한 장을 ...

    연관인물 김영갑 더보기
  •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 | 두산백과

    프랑스의 사진발명가. J.N.니에프스가 발명한 헬리오그래피를 다시 발전시켜 다게레오타입이라는 독자적인 사진현상 방법을 발명하였다.. 1787년 11월 18일 프랑스 파리 북서쪽에 있는 코르메유 장 파리지에서 출생하였다. 1801년 오를레랑에서 건축공부를 하였고 1804년 파리로 돌아와 무대배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기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디오라마(반투명상의 캔버스에 풍경화를 그리고, 이에 반사광선이나 투명광선을 써서 변화시키면서 보여주는 것) 화가로 유명했던 피에르 프레보의 조수가 되어 그림을 그렸다. 파리에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디오라마의 화가로서 점차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819년 파리 오페라하우스의 무대화를 제작하는 감독이 되어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1824년 자신이 직접 디오라마 전용극장을 개관하였으며 카메라 암상자(暗箱子)를 쓰던 때에, 그 화상을 기계적으로 정착시키려는 의도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1829년 12월 14일 같은 의도로 연구에...

    연관인물 루이 쟈크 망데 다게르 더보기
더보기

'사진이란' 지식iN 검색결과 (354,233)

제목 답변 조회 작성
위성'사진이란'무엇인가요? 1 52 2014.04.14.
즉물적 '사진이란'..? 1 95 2015.04.17.
'사진이란'어플 이미지 1 45 2014.02.15.
위성'사진이란' 1 27 2014.03.13.
빈티지 '사진이란' 무엇인가요? 1 682 2014.04.26.
의견
수정문의 수정내역보기 0
댓글 쓰기
댓글 입력
현재 입력한 글자수0/전체 입력 가능한 글자수500
댓글 정렬 옵션 선택BEST의견전체의견선택됨
BEST의견 운영 기준 안내안내 레이어 보기
의견이 없습니다.
첫번째 의견을 남겨주세요.

함께 많이 본 표제어

회화

더보기>

event 배너

애니메이션 참여백과 바로가기
TOP

[네이버 지식백과] 사진 [寫眞]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